
평론|방진원
(서진아트스페이스 대표, 서울시 도시건축전시관 운영위원)
“자연은 말없이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듣기 위해 우리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눈을 감아야 한다.”
이플 작가의 개인전 《풀 잎 사이로 초록》은 바로 그러한 자연의 언어를 시각적으로 번역한 하나의 예술적 시도이자, 감각적 사유의 총체이다. 이번 전시는 유화(Oil)와 유화파스텔(Oil Pastel)이 혼합된 화면 위에 형상화된 내면의 식물적 풍경을 통해, 보는 이의 감각을 서서히 초록으로 물들인다.
이플 작가의 작업은 단순한 자연 모사의 차원을 넘어, ‘자연-되기(becoming-nature)’의 심리적, 정서적 상태를 화면 안에서 구현한다. 특히 「스며든 초록」(72.7×60.6cm, 2025), 「내 겨울은 초록색」(45.5×37.9cm, 2025), 「풀 위 바람 2」(24.2×40.9cm, 2025)와 같은 주요 작품들은 현실의 초록이 아닌, 기억 속 어딘가에 침윤된 감각적 푸름을 그려낸다. 이 작업들은 실제의 자연 풍경이라기보다는, 감각의 층위를 거쳐 재조합된 심상의 자연이다.
화면 전체에 배어 있는 부드러운 붓질과 겹겹이 쌓인 색채의 결은 마치 숨결처럼 조용한 생명의 파동을 불러일으킨다. “이 겨울은 초록색”이라는 언어적 역설이 제안하는 시선의 전환처럼, 이플의 세계는 계절과 정서를 직선적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오히려 감각의 역류, 정서의 편향, 시간의 변속을 통해 감상의 리듬을 부드럽게 교란한다.
작가는 캔버스라는 정적 평면을 통해, 초록이라는 색이 갖는 공감각적 질감과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간다. ‘햇볕을 머금은’이라는 제목처럼, 작가의 초록은 광원과 시간, 계절과 기분의 교차지점에서 생성된 ‘삶의 단편들’이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는 단순히 초록을 ‘보는 것’을 넘어, ‘머무는 것’, ‘들여다보는 것’, 나아가 ‘느끼는 것’의 경험으로 옮아가게 된다.
《풀 잎 사이로 초록》은 자연에 대한 정서적 공명과 더불어, 도시 속 인간이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시키는 회복적 시각 체계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이 전시는 ‘자연’이라는 보편의 주제를 가장 섬세하고도 사적인 방식으로 조율하는 감성적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성취라 할 수 있다.





